00.
박사.
확인해줘.
01.
인류가 문명을 건국한 이래 과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청소를 대신해 주는 기계, 음식을 만들어주는 기계, 샤워를 대신 시켜주는 기계, 사람을 싣고 철도 위를 달리거나 인류의 숙원이었던 비상을 돕는 기계. 그 종류를 따지자면 수도 없을 정도로. 나약하고 결핍한 기원 따위를 극복해 내기 위해 인류는 많은 것을 이루었고 발전의 산물은 무언가를 희생할수록 단계를 더해 나아갔다.
처음에는 기업 입찰 하의 정부 주도 공익사업이었다. 뉴스에 대대로 특파되어 모르는 이가 없는, 사측의 부주의로 인해 발생한 사고로 피해를 본 건설 노동자의 보상안으로 제시된 최초의 기계 팔. 그다음으로는 TV 복지 프로그램에서 선보이게 된 육상선수를 꿈꾸던 아이의 선천적인 다리 장애를 극복한 기적이었다. 팔과 다리, 질병이나 타고난 외모도 전부 바꾸고 싶나요? 더 나은 당신이 되고 싶은 거죠? 그렇다면 우리의 도움을 받으세요. 당신의 꿈을 이루어 보세요! 혁신적인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공학은 윤리를 저버린 메시아이자 새로운 돈벌이 수단이었으며 정부에는 복지의 일환이었다. 각자의 사정이 분명하니 바이오 공학은 거부할 도리 없이 인간의 세계에 깊이 스며들었다.
기술의 발전이 으레 그러하듯 부작용 또한 가파른 속도로 따라붙었다. 본래 필요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도입되던 기술은 사실 개인의 욕심에 완벽히 부합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타르 덩어리를 포기할 수 없어 돌이킬 수 없이 까맣게 물든 골초의 폐를 영원히 호흡할 수 있게 바꾸었다. 엉망인 식습관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위장을 멀쩡하게 돌려주었다. 젊어지고 싶은 이는 욕망을 위해 인공 면피를 스스로 얼굴에 이식했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어리석은 역사 속 인물이 바벨탑을 쌓아 올리듯, 사람을 매개로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끝내 안드로이드라 일컫는 기계 생명체를 만들기에 성공한다.
뼈와 피 아닌 철과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존재들을 생명체라 불러도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기계 같은 걸 붙이고 사는 게 뭐가 좋아? 이런 시대에서 태어나 많은 것을 누려온 카사하라 유키는 늘 그런 염세적인 의문과 불만을 품고 살았다. 그래도 타고난 눈치가 있어 누군가에게 말하기 위한 목적으로 입 밖에 꺼내 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를 둘러싼 것들이 카사하라 유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안드로이드를 얘기할 때면 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사하라 바이오는 그런 사회의 변화 수혜를 크게 받은 축에 속했고 혁신적인 신기술에 매료되어 과학을 신봉하는 자들이 거리에 즐비했다. 마냥 비판할 수만은 없는 것이 애초에 카사하라 유키도 살아있는 기계 생명체를, 안드로이드를 곁에 두고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박사.”
“응.”
“확인해 달라니까.”
KZ-00001. 카사하라 유키가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안드로이드 기체. 통칭 ‘카즈호’라고 명명된 기계 생명체는 요즈음 기체를 점검해 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 스스로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오류나 손상이 있을 때마다 종종 그래왔기에 낯선 일은 아니었다. 그의 타고난 성정이나 취향을 카사하라 유키가 지나치게 잘 알기에 구시대의 유물이 경고음을 내뱉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요청을 들어줄 때까지 카즈호가 그 자리에서 고집을 피울 것은 뻔한 사실이었으므로 한참 대답 않고 머뭇거리던 카사하라 유키는 결국 의자를 돌려 앉았다. 멀뚱한 낯을 앞에 두고 내키지 않는 듯 내뱉는 한숨이 자연히 허공에 뒤섞였다.
“어디가 문제인 것 같은데. 자가 진단은 했어?”
“응. 그래서 박사한테 왔어.”
감각이 이상해. 라며 카즈호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눈이 있을 위치에 달린 초소형 카메라가 박사에게 고정되어 조리개를 조였다 펴내기를 반복했다. 티가 나지 않아도 뻔히 연상되는 그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면서, 카사하라 유키는 마침내 손을 뻗는다. 온기를 가지고도 묘하게 딱딱한 피부 위에 제 것을 얹고 관절을 점검하듯 손가락을 하나씩 매만졌다. 여긴 어때. 괜찮아. 여기는. 응. 간단한 문진과 함께 겉보기엔 아무 이상도 없는 손가락이 부드럽게 굽혀지길 반복한다.
“촉각은 잘 느껴져?”
“응.”
“자가 진단에서는 뭐라고 나왔는데.”
“정상이라고.”
“……그럼 너 멀쩡한 거잖아!”
자아 있는 기계 생명체의 실없는 장난인가 싶은 생각 탓에 박사는 손을 놓는다. “이런 장난은 좀 그만둬. 너 때문에 머리가 다 아프다고….” 앓는 소리로 투덜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마무리해야 할 보고서가 결말부만을 남기고 있었다. 안드로이드의 점검을 거절하지 못해서 더욱 촉박해진 기한을 떠올리며, 카사하라 유키는 안드로이드를 내버려두고 다시 모니터에 몰두했다. 박사가 등을 보이면 기계 생명체는 잠시간 길을 잃는다. 단조로이 이어지는 타자 소리를 배경으로 두고 기계는 우두커니 앉아 있는 데에 그쳤다. 그게 못내 신경 쓰였는지 본업에 열중하던 박사가 다정한 물음을 건넨다.
“그럼 나한테 왜 온 거야? 전부 정상이고. 문제도 없고.”
“확인하고 싶어서.”
“뭐를?”
카즈호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뜻 겹쳐있던 박사의 잔상을 그리는 행위 같았다. 아카자키 카즈호는 아무 목적 없이 무언가를 지긋이 바라보는 일이 잦았고 카사하라 유키 또한 익히 봐온 세월이 있어 그의 습성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그 애의 본질을 생각해 본다면 박사가 모르는 것이 여전히 남아있기야 했을 것이다. 알아채자 곧장 거두어 비어버린 공간을, 뜻 모를 표정으로 응시하는 얼굴 따위는 카사하라 유키도 본 적 없었을 테니까.
02.
바쁜 카사하라 유키에게 끈질기게 들러붙어 기어코 점검을 받은 주제에 정작 카즈호는 정말로 자신이 고장 났다 생각하진 않았다. 전원 출력, 이상 없음. 관절부 구동, 이상 없음. 감각 센서, 마찬가지로 완전히 이상 없음. 정교하게 프로그래밍 된 회로에서는 자가 진단이 수시로 이어지고 있었고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기계장치의 점검 결과라고 해봤자 역시나 당연히 특별할 일 없어 늘 같았다. 사사하라 바이오 소속의 연구진답게 바이오 공학에 정통한 카사하라 유키가 의도한 시스템은 늘 오차범위 이내였다. 오히려 정상 가동되지 않으면 놀랄 일이었을 테다. 그러므로 기체 점검을 요구할 이유도 없어야 했다는 건 한낱 안드로이드에게 탑재되기엔 지나치게 과분한 논리 프로세스로 인해 카즈호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점검은 끝났고. 카즈호, 가기 전에 잠깐만.”
카즈호는 부름에 순순히 박사에게 다가갔다. 표정으로 말미암아 예상하자면, KZ-00001의 잦은 기체 점검 요청이 불안하여 전체 시스템 동작을 확인하려는 목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분석으로 명분을 만들고는 있지만 어차피 박사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하는 한낱 안드로이드였다. 그의 말에 따라 순순히 익숙한 조명이 비치는 의자 위 바른 자세로 앉아 명치의 플러그 삽입구를 드러냈다. 박사는 복부의 전선을 살필 정도의 오류는 아니라 판단했는지 그 이상 지시는 없었다. 검은 뱀 같은 케이블을 여러 개 꽂은 채 점검 모드에 진입한다. 내부의 데이터와 쌓인 기록을 확인하는 요란한 클릭음이 공간을 메웠다.
“전부 문제 없는데. 요즘 이상하네….”
“그런가.”
“그런가, 가 아니고. 무슨 일 있었어?”
카즈호에게 이런 질문은 좀 이상한가. 박사는 작게 웃었다. 호선을 그린 입꼬리는 자주 보여주지 않는 표정이었다. 데이터 속의 이미지와 대조하며 조용하던 카즈호는 곧장 고갤 끄덕였다. 그 의미를 짐작하지 않아도 별일 없다는 나름의 보고였다는 것쯤은 박사도 알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새롭게 생겨난 개선 사항을 정리하며, 카사하라 유키는 모니터에 프로그래밍 언어들을 써 내리며 그를 흘긋 보았다.
“나가 있게?”
“바빠 보여서.”
“으응. 그게 맞긴 하지만. …카즈호.”
“응.”
박사의 말이 이어질 때까지 가만히 멈추어 있던 안드로이드는,
“다음부터는 자가 진단에서 정상이면 나한테 안 와도 돼.”
“왜?”
기계 같은 행동을 하던 것치고 어울리지 않게 곧장 의문 섞인 되물음을 내었다. 뜻밖의 반응이라 유키는 무심결에 키보드 위를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왜냐니. 정상이라면서.”
“응.”
“그럼 내가 볼 필요 없잖아.”
원론적이고 당연한 이야기라 카즈호는 대답을 골랐다.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말문이 막혔다고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사의 요구는 사사하라 바이오의 주축인 카사하라 유키의 실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사하라 유키는 무척이나 바쁘고, 카즈호에 탑재된 것은 인간의 신체보다 정교한 시스템이니 쉬이 고장 나지 않는다. 창조주인 박사보다 늘 먼저 접하고 있어 제 몸의 상태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사양을 생각하면 진작 계산이 끝났을 시간인데도 잠시 생각하던 카즈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래. 착하네.”
카즈호는 박사의 말에도 별다른 대꾸 없이 연구실을 나섰다. 카사하라 유키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보고서 마지막 문단에 커서를 옮겼다. 몇 문장이며 수식을 적어 내리다, 계산의 토대로 쓰인 상숫값이 잘못된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다시 해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을 마주하고 만다. 나름 공들인 실험이었는데….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힘이 쭉 빠져 의자에 등을 기댄다. 습관처럼 그 애가 자주 앉아 있던 소파를 돌아본다. 당연하게도 아카자키 카즈호는 그 곳에 없었다.
03.
사흘이 지나는 동안 카즈호는 박사를 찾아오지 않았다.
드나드는 이가 많아 카사하라 유키의 개인 연구실 문은 자주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지만 카즈호에 의해 열리는 일은 전혀 없었다. 식사를 걸러도 따라붙는 잔소리와 겨우 취하는 짧은 쪽잠을 점검 따위로 방해하는 이가 없다. 바쁜 일에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씨.”
“…….”
“카사하라 씨!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네?”
“벌써 커피를 몇 잔이나 내리시길래…. 어머, 저 실례되는 질문을 했나요?”
그렇게 생각하는 카사하라 유키는 오늘만 해도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세 번 내렸다. 입에 가져다 대려다 잊어 식어빠진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붓는 건 네 번째였다. 무심결에 문이 있는 곳을 바라보다, 혼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는 시간을 수차례 보냈다. 이럴 때만 말을 잘 들어. 투덜거려도 듣고 대꾸해 줄 이가 없어 멋쩍게 입을 다무는 일도 많았다. 혼자 사용하는 연구실이 아니었다면 낯이 뜨거워질 일이었다.
“카사하라 씨. 생각이 많아 보이는데, 산책이라도 다녀오면 어때요? 사흘째 퇴근하는 모습을 못 봐서 슬슬 무서워지거든요?”
“아하하….”
“여긴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아, 혹시. 카즈호 보신 적 있어요?”
“네? 으음……. 네. 그럼요!”
연구실에 있다 보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계속 곱씹게 된다. 그럴 여유를 주고 싶지 않아 다른 연구원의 제안대로 오랜만의 산책을 위해 휴게실의 문을 밀어냈다. 오는 길에 봤죠. 중앙동에 있더라구요, 하는 타인의 상냥한 목소리가 등 뒤에 부딪혀 미끄러진다. 중앙동은 유키의 연구실과 대척점에 있다. 카즈호는 오늘도 오지 않을 예정이었던 모양이다.
카즈호의 행방을 물은 보람도 없이 그 안드로이드를 찾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연구동과 숙소동 사이를 잇는 유리 복도 끝이었다. 중앙동보다는 가깝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찾지 않았다는 것에 서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카사하라 유키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늦은 오후의 일광이 유리 벽을 통과하며 안드로이드의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카자키 카즈호는 예전부터 저러고 있는 일이 많았다. 밝은 햇빛이라던가 따듯한 온기라던가, 녹음의 싱그러움 따위는 전부 어울리지 않게 생겨서는 목적 없이 정원을 거닐거나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있길 반복했다. 처음에는 무슨 다른 목적이 있는걸까 오해했던 적도 있었지. 그런 유유자적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고. 친해지고 나서야 그 애에게 행동의 원리를 물었으나, 정작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만이 돌아와 허무해졌던 기억 또한 떠오른다. 핀잔하고, 웃고, 그 애는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자연스러운 장면에 생각이 미침과 동시에 카사하라 유키의 표정이 굳는다. 찰나를 지워내듯 멈추었던 걸음을 성급히 옮겼다.
“카즈호.”
눈에 달린 카메라가… 움직였다. 아니, 그 애의 시선이던가.
“박사.”
“…여기서 뭐 해? 햇빛이 좋아?”
“그런 건 아니야.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응. 아무것도.”
예상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을 돌려주면서 카즈호는 카사하라 유키의 면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오게 된 사유를 전부 들어줄 것 같은 표정을 한 주제에 며칠간 못 본 얼굴에 익숙해지는 듯한 기색 같기도 했다. 분명 용건을 요구하는 것이겠지만 애석하게도 카사하라 유키가 가질만한 용건은 딱히 없었다. 그저 슬슬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료의 부담스러운 관심을 돌리려면 산책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았고. 우연히 이런저런 기회가 맞물려 나서게 된 거지. 아무도 듣지 않을 변명을 홀로 줄지어 나열하는 사이 화제는 자연스레 일전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안 찾아온 거 보니 이젠 다 괜찮아졌나 보네. 잘 살았어?”
“안드로이드는 살아있다고 할 수 없어.”
“그냥 하는 말이잖아. 너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왜?”
“됐어, 안 알려줘. 자가 진단은?”
“정상이야.”
“이상한 데는 없고?”
“응.”
그래. 가벼운 문진을 마치고 정적이 이어진다. 그 애와의 정적은 익숙했다. 새삼 비어 있는 손이 허전해 제 손만을 맞잡고 있으면 기를 막히게 하는 안드로이드는 사려 깊게 눈치채고 캔 커피를 들려준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버린 것과 같이 식어빠진 것이었으나 돌려줄 마음은 안 들어 그대로 쥐길 택한다. 존재할 리 없는 초침 소리 사이에 웬일로 안드로이드가 박사를 부른다.
“박사.”
“왜.”
“안 바빠?”
“바빠.”
“그럼 왜 여기 있어.”
정곡을 찔린 박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카즈호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언젠가 입력된 대로 손을 뻗어 미간을 문질렀다. 고작 며칠간 접촉이 없었을 뿐인데도 센서에 전해지는 감각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유리창 바깥의 구름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건물 아래의 정원 사이 저마다의 목적지로 향하는 인파와 자기부상열차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카즈호랑 있을 때는 저런 광경조차 느리게 느껴졌었는데, 세상은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거였나. 유순히 얼굴을 내어준 채 상념을 흘려보내는 박사를 알긴 아는 것인지, 안드로이드는 끈질기게 그를 관찰한다.
“그래도…”
“…….”
“…박사가 먼저 와 주었네.”
“…무슨 뜻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질리도록 익숙한 한 마디와 함께 카즈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카자키 카즈호는 추궁을 한대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언가를 풀어 말해주는 경우는 더더욱 드문 축에 속했다. 유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몇 마디 핀잔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모든 게 기분 탓이라는 걸 알지만, 마치 말에도 중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이 새삼 생소하게 느껴져 귓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얼른 날아가 버렸으면. 제발, 한없이 가벼워지기를 바라며….
04.
자가 진단 이상 없음: 14회.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발생함: 14회.
그중 박사에게 점검 요청: 11회.
요청 즉시 박사가 작업을 중단함: 9회.
5분 이내 점검 시작: 11회.
기체 접촉 발생: 11회.
카사하라 유키는 불만스레 입술을 다물고 있다가도, 잠깐 쉬러 나왔고 다시 연구실에 돌아갈 것이라며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다. 박사가 원하는 것 같기에 건네주었던 캔 커피는 내용물이 전부 비워져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아예 오지 말란 말이 아니야, 바보야. 카즈호는 아무 때나 와도 돼.”
뾰로통하게 말하고 있지만 본질은 새로운 지시에 가까운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던 카즈호는 기동 이래의 데이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세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
11회의 행동 원리가 비슷했던 것으로 보아 박사는 KZ-00001의 이상 보고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음이 명백하다. 입력된 사전 지식에 따르면 아마 KZ-00001이 박사가 만들어낸 최초의 기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사하라 바이오에서도 이만한 업적을 이루어낸 연구진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인공 바람으로 인해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시선 붙박힌 채 카즈호는 사고를 이어간다.
기억 메모리 속의 박사는 대체로 상냥하다. 주변인에게 착하고 다정하다는 평가를 많이 듣는다. 외향성은 인간 중에서도 뛰어난 듯 보이지만 정말 애정 따위가 뒤따르는 것 같진 않다. 홀로 있을 때엔 종종 외로워하고, 사람을 곁에 두려 하지 않는다. 관찰한 바로는 누군가를 붙잡는 일도 드물었다. 그렇다면. 박사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던 걸까. 인간이란 홀로 살아갈 수는 없는 존재죠. 우리에게 안드로이드가 필요한 이유예요. 언젠가 TV에서 들은 쇼 호스트의 목소리가 사고 칩 안에서 재생된다.
대다수의 인간들과는 다르게 사실 박사는 애착을 경계한다고 한다. 필요 이상의 애착은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현재에 안주하게 만든다고 했다.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고도. 음주로 인해 얼굴이 벌게진 채로 작게 떠들면서 하는 소리가 그리 말해왔기에 따로 보고하지 않고 저장해 두었다. 그래서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박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구실에 찾아갈 때면 꼭 자신의 손을 잡았다. 지나치게 바쁜 게 아니라면 2분 남짓할 시간이면 끝날 점검이 길어질 때도 많았다. 점검 시의 평균 체류 시간: 32분. 카즈호는 계산이 끝난 데이터를 추가했다. 박사는 KZ-00001과의 접촉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박사의 행동은 TV 속 인간의 말을 증명한다. 박사는 외로워하지만 KZ-00001가 아닌 다른 개체에게 결핍을 보이지 않는다. 그 자신의 애착을 경계한다는 말과 모순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KZ-00001에게 있나.
바람이 쏴아, 불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파도치듯 요동치는 풍경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카즈호는 이윽고 제 오른손을 내려다본다. 천천히, 인간이 기억을 더듬듯이 기동 이후 입력된 데이터를 조회한다. 점검 기록에서 행동 기록을 거쳐 인격 학습 기록까지. 최초 시스템 구축에 사용되고 정작 운용에는 쓰이지 않아 별도의 저장소에 격리되었던 초기 버전의 기록도. 박사가 KZ-00001에 심혈을 기울인 만큼 방대한 기록을 차근히 읽어내렸다. 이 감각의 원인을 찾아 박사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애착을 느끼도록 설계되지 않은 KZ-00001이 정상 범주 내인 자신의 몸을 핑계 삼아 카사하라 유키를 찾아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KZ-00001의 저장소에는 기체가 거친 대규모 수정 기록이 스물일곱 개의 문서로 남아있었다. 작동 오류나 망가진 회로를 고친 건 고작 여섯 번에 불과했고 남은 스물한 번의 기록은 프로세스의 작용 방식을 수정한 것으로 조회되었다. 발화 간격, 웃음 발생 빈도, 물리적 거리 한도와 선호 식품군 변경. 각종 환경에 대한 선호도와 질문 응답 시간 등. 안드로이드가 인간에게 인식되는 요소들. 고장과는 무관한, 사용자가 임의로 조정한 그 항목들을 되짚으며 카즈호는 한동안 멈추어 있었다. 열어보고 싶지 않은 직감이 희미하게 찾아왔다. 안드로이드에게도 그런 게 존재한다면.
모든 안드로이드는 학습하는 개체이다.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용자의 생활에 맞추어 스스로를 조정한다. 그것이 안드로이드가 인간에게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박사는 어째서 구태여 수동 조정을 한 것일까. 카사하라 유키가 그 자신을 위해 직접 설계한 ‘카즈호’인데도. 마치 고민이라도 하는 양 머뭇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을 연다. 카즈호는 기록에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카사하라 유키는 늦은 밤에도 연구실에 남아있었다.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던 해는 이미 수평선 저편으로 넘어간 지 오래라, 수많은 직원들이 퇴근해 비어버린 연구소는 정적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밝게 켜져 있는 조명에도 불구하고 장소의 특수성 탓에 을씨년스러운 한기가 드리운다. 그런 것쯤은 익숙해진 카사하라 유키는 실험 계획을 마무리하고 잠시라도 눈을 붙일 작정이었다. 낮의 산책으로 인해 일이 밀렸다. 과한 업무에 시달리는 그의 등 뒤로 연구실의 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닫히는 인기척이 났다.
“박사.”
예상한 목소리가 들려와, 카사하라 유키는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점검이야? 이번에는 또 어딘데.”
“아무 데도.”
이 시간 쯤 방문하는 카즈호는 늘 어딘가가 이상하다고 말해왔기에, 카사하라 유키가 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를 유지했던 탓에 뻐근한 어깨를 돌리던 박사가 그제야 고개를 든다. 안드로이드는 어두운 곳에 우뚝 서 있었다. 언젠가 그 애가 장난칠 작정으로 귀가를 기다리던 것처럼.
“뭐?”
“…….”
박사. 단조로운 목소리는 다시 작게 공명했다. 느린 걸음 소리가 직후 이어진다. 형광등의 밝은 불빛이 오늘은 아지랑이처럼 시야 안에서 산란한다고, 그래서 더욱 이 순간이 아득하게 느껴진다고.
“나는.”
“…….”
“제대로 만들어졌어?”
“…….”
“'카즈호'와 닮아 있어?”
무심결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05.
너는 그 애가 될 수 없어.
06.
동기였다. 같은 해, 같은 시기에 함께 입사한. 본래 홀로 사용할 예정이던 연구실에 그 애의 자리가 같이 생긴다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다. 연구에 몰두할 때만큼은 혼자 있고 싶었지만, 이미 결정된 사안을 멋대로 번복한다면 안 그래도 눈엣가시일 사장 아들을 두고 어떤 말들이 오갈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조금 불편해도 동갑이라면 오히려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 의식적으로 질리는 기분을 아쉬움으로 포장하며 무거운 연구실의 문을 밀고 발을 들였다.
안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까만 인영 하나가 창 바깥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연구실을 둘러보거나 짐을 정리하지도 않고. 그저 오가는 세상을 지켜보는 것에 불과한 행동처럼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지만은 않은 첫인상이었어도 그저 그런 동료 직원처럼 여기며 잘 지내볼 생각은 여전히 존재했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까진 노력하기도 했다. 실제로 며칠간은 제법 적당한 동료처럼 어울렸던 것 같았다.
“아카자키. 내 샘플 어디 있는지 알아?”
“…아. 거기.”
“으음. 옮겨두었다는 거지? …왜 멋대로 만져?”
“…미안. 떨어질 것 같아서. 앞으로는 떨어지게 둘게.”
“…….”
아카자키 카즈호는 그제야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아래쪽 서랍을 가리켰다. 여러 개의 서랍 중에 두 번째라고 덧붙이는 목소리가 뒤늦게 따라왔다. 묘하게 말끔해진 책상 위를 훑어본 뒤 서랍을 열었다. 샘플본은 라벨 방향까지 맞추어진 채로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주제에 신경 쓴 게 보여서, 마찬가지로 보이는 표정도 꽤나 겸연쩍은 기색 띠고 있기에. 유키는 오히려 할 말을 잃어 입을 다물었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런 일들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열두 시가 되면 카사하라 유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험의 진척도나 회의 준비가 덜 끝났어도 되도록 끼니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몰두하는 프로젝트가 있다고 해서 생활 습관을 망가뜨리면 안 된다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아카자키 카즈호는 끼니라는 걸 챙길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식사를 하기는 하는 걸까. 에너지 캡슐 따위로 때우는 건 아닐까.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한 번 생각하고 나니 종일 거슬릴 것 같아 카사하라 유키는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아카자키. 밥 안 먹어?”
“응. 이따가.”
“지금 같이 먹으러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아. …바빠서.”
“먹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
아카자키 카즈호는 잠깐 생각하더니, 달리 대꾸할 말이 없는지 유키의 낯을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 꼴을 지켜보며 카사하라 유키는 역시 말이 안 통하는 애라고 생각했다.
그런 주제에 아카자키 카즈호는 카사하라 유키의 식사만큼은 부지런히 챙겼다. 유키의 생활 습관을 학습한 안드로이드라도 되는 것처럼. 어쩌다 식사 시간이 늦어지기라도 하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삼십 분 정도가 지난 채 돌아왔다. 손에는 유키가 즐겨 먹는 브랜드의 샌드위치가 하나 들려 있었다. 왜 샀냐는 물음을 건네기도 전에 쥐여주기에 결국 이유를 물을 틈 없이 다 먹었다.
연구 방식도 역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카사하라 유키는 결과가 나오면 즉시 다음 실험으로 넘어가는 성격이었다. 틀린 부분이 있다면 그때 수정하면 되니까. 전체적인 방향을 잡아놓고, 그 안에서 수정하는 편이 보고를 위해서라도 더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아카자키 카즈호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 애는 함께하는 실험에서조차 결과가 예상한 바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더라도 한참 동안 화면 앞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은 참다못해 아카자키 카즈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뭘 그렇게 봐. 실험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응. 맞는데… 생각 중이야.”
“어떤 걸?”
“왜 이렇게 나왔는지.”
“생각해 보는 건 중요하겠지만… 예상한 값이잖아. 괜찮지 않아?”
“그런가.”
“으응.”
아카자키 카즈호는 그럼에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분명 그런가, 같은 말을 해놓고 그 사이의 인과를 끈질기게 더듬고 있을 테다. 이제는 이 정도 행동쯤은 예상할 수 있게 된 카사하라 유키가 다시 그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그런 행동을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카즈호, 피곤하게 산다.”
“그럴지도. …유키도 같이 생각해 줘.”
자연스레 자문을 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함께 하는 순간에는 그 애는 꼭 유키에게 의견을 물어오곤 했다. 가볍게, 혹은 함께 고심하여 몇 마디 던져주면 오래 생각해 보고, 납득이 가면 별다른 고집도 없이 연구 방향에 반영했다. 줏대 없어 보였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성격도, 생활 방식도, 연구를 대하는 태도도 맞는 구석이 없다시피 했다. 경쟁심이나 호승심도 묘하게 강해 이상하고 사소한 내기를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런 방식으로 얻어 마신 커피만 서른 잔을 익히 넘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연구실을 따로 쓰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옅어져 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책상 위의 물건이 사라지면 두 번째 서랍부터 열게 되었고, 정오가 가까워지면 그 애와 함께 어떤 걸 먹을까 생각했다. 실험값이 지나치게 깔끔하게 떨어지면 아카자키 카즈호와 함께 그 이유를 고민했다. 누군가와 함께 연구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지는 건 생각보다 생경한 감각이었다.
이런 애니까 친구가 되고 싶은 거야. 나에 대해 함부로 기대하지 않고 항상 기다려 주니까. 필요할 때 꼭 알맞은 위로를 건네주고. 이 애랑 있을 때면 마치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아서.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 어떠한 이유를 대더라도 전부 마땅한 것처럼 느껴졌다. 꼭 신이 가까워질 인간 둘을 한 방에 밀어 넣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되고 있었다. 근거는 오직 운명이라는 것뿐인, 카사하라 유키가 내렸다기엔 꽤나 부실한 결론이었다.
07.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데에 특별한 계기 같은 건 필요치 않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타인의 악의가 싫어 처음 그어두었던 선은 어느덧 흐릿해져 있었다. 그 애와 커피를 나누어 마시고 쓰잘데기 없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는 날들이 단조로이 이어졌다. 연구실에 들어서면 그 애가 있는 게 당연했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르는 내내 그랬다. 말로 할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도 이런 날이 계속되었으면 바라게 되었다. 그만큼 즐거웠다.
“유키.”
“응?”
“벌써 눌렀어?”
회사의 정기 윤리 교육이었다. 형식 상의 교육이라곤 해도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건 같았기에 아카자키 카즈호와 카사하라 유키는 나란히 앉아 스크린에 쏘아지는 질문을 보고 있었다.
인간 A의 기억, 외형, 성향과 행동 양식을 완전히 복제한 인공생명체 B를 A와 동일한 존재로 간주할 수 있는가?
아, 몇 개월 전에도 같은 질문이었던 것 같다. 카사하라 유키는 별 뜻 없이 정답지인 버튼을 눌렀다. 그 모습을 흘끔이던 아카자키 카즈호는 예의 물음을 끝으로 버튼의 케이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카사하라 유키는 팔을 툭 건드린다.
“카즈호. 뭐해?”
“생각 중이야.”
“그냥 교육용 질문이잖아. 너도 전에 봤던 거면서.”
“……그래도.”
질문이니까 생각해야지. 높낮이가 뚜렷하지 않은 목소리를 흘려보내며, 카사하라 유키는 턱을 괴고 그를 지켜본다. 초청 강사의 제한 시간이 끝날 때까지 버튼이 눌리는 일은 없었다. 어쩐지 기운 빠지는 듯한 느낌에, 카사하라 유키는 푸스스 웃으며 책상에 기대었던 몸을 거둔다. 쓸데없이 열정적인 강사로 인해 스크린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인간이란 홀로 살아갈 수는 없는 존재죠. 우리에게 안드로이드가 필요한 이유예요. 언젠가 보았던 TV 프로그램 패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현대와 같은 삶의 형태로 접어들며, 인간은 점점 온기를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들, 생각해 주세요. 곁의 동료나 친구가 없는 삶은 어떨 것 같습니까? 네에, 외롭겠죠? 사사하라 바이오는 그 부분을 정확히 짚어낸 겁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나와 닮은 로봇을 만들게 된 거죠.”
강사는 숨을 고른다.
“안드로이드가 보편화된 요즘 세상에서는 다시 한번 고찰할 주제가 많습니다. 기억과 행동이 동일하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여러 윤리 문제는 이런 부분에서 일어나곤 하는데요…….”
강사의 말이 점점 길어진다. 의미 모를 철학적인 고찰을 거듭하는 내내 아카자키 카즈호는 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꽤 열중이기에, 어쩐지 호승심이 일어 카사하라 유키 또한 남은 강의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이것조차 꽤 즐거웠다.
강의가 이루어지는 중앙동은 연구동과 가까웠다. 유리 벽으로 된 연결 복도를 건너면 곧 유키와 카즈호의 연구실에 도착한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마침내 끝이 난 강의로 인해 세미나실을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얼핏 보아도 연구원처럼 보이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으으, 엄청 오래 걸렸네!”
“…그러게. 피곤하겠다.”
“응! 마음 같아선 돌아가자마자 자고 싶어.”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습관처럼, 두 명 분의 시선이 유리창 너머 바깥에 닿는다. 해가 지는 탓에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애와 같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한가로이 바라본다. 카사하라 유키에게 이런 걸 가르친 장본인인 아카자키 카즈호는 정작 유키를 보고 있었다.
“유키.”
“응?”
“우리 오래 같이 일할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손끝이 가볍게 스친다. 머뭇이던 것이, 온기를 지닌 채 손등을 덮어온다. 미약한 힘으로 맞닿아 자연스레 떨어지지 않았다. 답지 않은 행동에 무심코 돌아본 옆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세상을 물들 정도로 밝은 노을 탓인지, 손끝을 매개로 전해지는 온기 탓인지 카사하라 유키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냥. 오늘 교육 듣는데….”
“…….”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너랑 같이 들으니까 재미있어서.”
복도에는 신발의 굽이 맞닿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려왔다. 유리된 세계에서 카즈호의 목소리가 유키에게만 속삭이듯 작아진다.
“유키는. …다른 유키가 생긴다면 어떨 것 같아.”
“……글쎄. 좋지 않을까? 귀찮은 잡일은 다 시키고 난 연구만 할 거야.”
“……그건 좋은 생각인데.”
작은 웃음들 사이로 바람 소리가 끼어든다. 기분 좋을 만큼 선선한 바람이 휘감듯 맞닿은 손 틈 사이로 스쳐 흘러간다. 간지러운 기분에 시선을 애써 돌리고 나면, 늘 그렇듯 평화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예를 들어, 나랑 똑같은 게 만들어진다고 해도.”
“으응.”
“걔는 유키랑 같이 이런 교육 들은 적 없을 테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그래? …만약 기억까지 넣어준다고 하면?”
“……그럼 같은 사람이라 믿고 싶어질지도.”
“뭐야?”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사람이 홀로 살 수 없듯이 내가 ‘나’이게 되는 건 내 생각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거니까.”
결국 사람이라는 건 혼자 완성될 수 없다는 거야.
단조로운 목소리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설명을 이어가지 않았다. 이해하는 건 유키의 영역이었다. 예컨대 그런 것이겠지. 누군가가 기억하는 모습과, 함께 보낸 시간같이 서로에게 남긴 것들이 엉겨 하나의 사람이 된다면. 그것들을 모조리 옮겨놓은 존재를 앞에 두고도 끝내 다른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카자키 카즈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불친절한 친구 아닌 친구의 말로 인해 오래도록 고심하는 동안 손을 쥐는 힘은 점차 강해졌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지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카사하라 유키는 생각을 얼추 마치며 자연스레 시선을 돌린다. 곧 시야에 드물게 호선을 그린 입꼬리가 보였다.
“유키, 바보 같은 표정.”
“……아니거든!”
“아닌 게 아닌데. 바보네.”
“네가 더 바보야. 바보 카즈호!”
평소와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맞잡은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바보인 아카자키 카즈호라면 아마 별 의미 없이 그냥 잡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결과로 일방적인 온기가 전해지는 상황이 마냥 나쁜 기분은 아닌 탓이었다. 어쩌면 그 애의 말대로, 정말 오래도록 같이 일할 수 있을 거라 무심코 생각해 버린 탓에.
08.
아카자키 카즈호가 없는 연구실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조금 탁해진 공기를 제외하면 카즈호가 없다는 걸 알 수 없었을 만큼. 샘플은 정리되어 두 번째 서랍 안에 들어있었고, 누군가 사다 놓은 샌드위치는 내용물이 시든 채로 냉장고 안에 들어있었다. 카사하라 유키는 연구실에 발을 들이고 곧장 커튼을 걷었다. 투명한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그 애가 자주 앉던 소파 위에 쏟아진다.
장례에 이르기까지 처리해야 할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연락할 가족을 찾아냈다. 사내 연락망에 기재된 가족에게 사망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런 잔인한 역할은 아카자키 카즈호와 가장 가까운 동료였다는 이유만으로 카사하라 유키에게 떠밀어졌다.
수화기 너머의 중년 여성은 이야기를 듣자 울음을 터트렸다. 담담한 척 이어지는 목소리의 끝이 형편없이 떨려왔기에 알아챌 수 있었다. 회사에서 지원되는 부분과 유가족이 준비해야 될 부분 따위를 총무과에서 전달받은 내용대로 전하고 난 후 통화를 마무리했다. 수화기에서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릴 때까지 내려놓지 못했다.
그 애의 가족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아카자키 카즈호와 지나치게 닮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하나같이 눈가가 벌겋게 물든 채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정면에 놓인 사진 속 얼굴만 유난히 말끔해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카사하라 유키입니다. 카즈호의 동기예요. 이번 일은… 안타깝게 됐어요.”
“아, 당신이…….”
중년의 여자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카즈호에게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카즈호가 제 얘기를 했나요?”
“네. 연구실에서 사귄 친구라고요. 유키 군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유키 군 얘기를 할 때는 종종 웃음소리가 들렸거든요.”
드물게 말을 잃어 입을 다문다. 무표정한 낯 덮은 유리에 형광등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못이 박힌 것처럼 사진 속 아카자키 카즈호를 바라보는 걸 눈치챘는지, 아카자키 미네카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며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유키 군도 소중한 친구로 여겨준 모양이에요. 다행이네요.”
“…….”
“저기, 카즈호는 회사에서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 다정하고 일상적인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부조금을 건네고, 말끔한 낯에 인사를 건네지 못한 채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넋이 빠진 것 같은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회사 건물까지는 카즈호의 아버지께서 데려다주었다. 아카자키 토요타로 씨는 그 애처럼 말 수가 적었다. 정적이 조금 괴로웠던 감각이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회사에 돌아왔고, 장례식도 다녀왔으니 이제는 정말 정리해야지. 카즈호가 남긴 것들을… 미네카 씨가 다시 물어온다면 제대로 대답할 수 있도록.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유키는 그의 기록을 열람한다.
공동 연구자였던 카사하라 유키에게는 아카자키 카즈호의 연구 기록 상당부를 조회할 권한이 있었다. 기록은 여러 형태로 존재했다. 그 애를 토대로 축적된 정보와 음성 기록, 영상 기록. 업무 중 행동 데이터나 회사 건강검진 기록 같은 생체 데이터 등. 한 사람을 데이터로 환원한다면 무엇이 남는지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음만 먹는다면 하나의 '생명체'를 학습시키기에 충분할 만큼의 토대가 남아 있었다.
파일 목록을 주욱 훑어내리던 카사하라 유키는 아무 기록을 골라 재생했다. 음성 데이터였다. 몇 가지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을 천천히 읽어 내리는 내용이었다.
「청록의 숲은 물결처럼 흔들리고, 이따금 들려오는 유율 타악기의 소리. 젖은 흙내음 맡으려 열어둔 창문에, 경계도 모르는 네 기억이 들이찬다….」 *
익숙해 마지않은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사하라 유키는 저도 모르게 그 목소리를 처음으로 되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인지 셀 수 없게 되었을 즈음에는 더 이상 내용이 중요치 않았다.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얼굴이 보고 싶기에 영상 기록을 뒤져 선명하게 나온 부분을 찾아 멈춰두었다. 생전에도 그리 많이 나누지 않았던 메신저 기록에서 자주 사용하던 문장을 추출했다. 말끝을 흐리는 방식, 대답하기 전 생기는 간격,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던 습관. 기억나는 것과 기록된 것을 하나하나 맞추어 보았다.
정말 단지 그뿐이었다. 남겨진 것을 정리하려고 했다. 카즈호의 성격대로면 분명 정리해 주길 원할 테니까. 그런데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얼굴이 남아 있었다. 신체 정보가, 그 애의 모든 것이 데이터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카사하라 유키는 그것들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완벽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그 생각이 한 번 떠오르고 나자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제작 계획을 그 애의 이름을 따 KZ 프로젝트라 명명했다. 인공적인 생명체를 창조하겠다는 오만한 말은 새로움을 갈구하던 기획부에서 쌍수를 들고 반기는 종류가 되었다. 인간의 생체·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나의 인격에 가까운 기계 생명체를 구축한다는 발상은 사사하라 바이오가 오래도록 바라던 종류의 성과였다. 그들에게 아카자키 카즈호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기계 생명체를 연구했다. 그리고 몇 가지 원칙을 수립한다.
1. 아카자키 카즈호의 개인 기억은 직접 이식하지 않는다.
2. 외형과 신체적 특징, 행동 습관은 전부 사용한다.
3. KZ-00001에게 ‘아카자키 카즈호’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4. 연구자는 KZ-00001이 ‘아카자키 카즈호’를 토대로 제작된 복제체임을 잊지 않는다.
이 정도면 된다. 그 애를 완벽히 대체하려는 목적은 아니므로.
기본적인 구축을 마치고 모니터를 응시하며 정보들을 기입한다. 자신과 카즈호 사이의 기억은 기본 사항만을 넣는다. 좋아하는 음식은 넣었다. 창밖을 보는 걸 좋아했으니, 안드로이드 카즈호도 그러는 편이 좋을 것이다. 목소리와 말투도 모든 데이터를 활용한다. 연구자를 비롯한 타인을 응시하던 시선까지. 그 모든 게 아카자키 카즈호와 동일하도록.
기억만 없으면 다른 존재가 된다. 그 애도 그렇게 말했었어. 기계인 카즈호는 나를 ‘유키’라고 부르지 않게 할 거니까. 외로운 게 싫어서 그래. 카즈호도 분명 괜찮다고 해줄 거지. 그러니 괜찮아…. 홀로 중얼거리며 올바르게 적힌 정보들을 다시금 훑어내린다. 입력한 데이터들의 끝에 도달한 커서가 제자리에서 깜빡인다. 오래도록 기억해 내듯이. 카즈호에게 자신이 박사임을 새겨 넣는 것처럼.
며칠의 밤이 지나 완성된 기체가 전선을 주렁주렁 단 채 기계 속에서 몸을 일으킨다. 카즈호와 같은 얼굴. 카즈호의 목소리. 박사는 창조주인 주제에 그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눈을 뜬 KZ-00001은 제 앞의 인영을 인식한다. 기계 부품으로 만들어진 입이 열린다.
“박사.”
카사하라 유키는 안도했다.
동시에 조금 속이 울렁거렸다.
아카자키 카즈호는 절대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박사.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기계는 인간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무덤덤한 낯이 뜻을 헤아리듯 물끄러미 지켜본다.
“거짓말.”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정적에 파묻힌다. 기계는 한참이나 가만히 있다가 스스로 전선을 떼어내며 몸을 일으킨다.
“박사. 내 이름은 뭐야?”
“…….”
박사는 입술을 잘근 깨문다. KZ-00001. 모델명을 말해주면 되는 것이다. 정해둔 말을 꺼내지 못한 건, 시야 사이로 스치는 게 지나치게 닮은 모습이라서. 박사는 끝내 대답하고 만다. 카즈호라고 해. 대답을 들은 안드로이드는 번복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고갤 끄덕였다. 카즈호. 스스로 발음하며 학습했다.
“응. 박사.”
순순한 대답을 듣고서야 박사는 숨을 몰아쉰다. 제대로 만든 것 같아. 카사하라 유키에게는 유일한 안드로이드의 탄생이었다.
09.
박사는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안에서 생활이 가능하도록 시설이 완비된 연구실이었던 터라 식사나 세면 등의 이유로 나오는 일조차 없었다. 들어가려고 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권한이 없다는 알림을 보면 허가 목록에서 ‘카즈호’를 제외한 것 같았다. 데이터에 쓰인 정보로 인해 확실히 깨달았다. 박사는 회피하는 것이다. 그토록 신경 쓰던 주변인의 평판과 기체의 점검 따위는 그에게 아무 의미 없다는 듯이.
KZ-00001 기체에는 더 이상 오류 사항이 발생하지 않았다. 감각이나 의문 또한 수면 아래에 잠긴 듯이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해야 할 일은 있었다. 수행할 수 있는 업무와 지시받은 일정이 이행되지 않았다며 이따금 경고 알림을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이곳을 떠날 이유가 되지는 못해 문 앞에 앉은 채로 논리 회로를 점검하고 있었다. 원래의 ‘카즈호’라면 어땠을까. 박사가 들어간 문 앞에서 앉아있는 내내 생각해 보아도 행동을 도출해 낼 수 없었다.
박사가 스스로 문을 연 건 그로부터 6일이 지난 후였다.
“카즈호.”
“응.”
“얼마나 앉아있었어?”
“134시간 19분. …이제 20분.”
“……들어와.”
잠긴 목소리로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채 연신 마른세수를 하던 박사는, 결국 방으로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문에서 비켜섰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한 탓인지 일어서는 다리의 관절부에서 평소보다 거친 기계음이 났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회로에 오래 남았다.
박사의 방은 어두웠고 먼지가 조금 내려앉아 있었다. 방에 있으면서도 정상적인 생활은 하지 않은 듯, 조금씩 엉망인 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청소를 할 작정으로 카즈호는 커튼을 걷는다. 햇빛 아래 부유하는 먼지와 밝게 빛나는 박사가 보였다.
박사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다 입을 연다.
“…내가 널 망치고 있는 것 같아.”
“박사.”
“대답하지 마. 명령이야.”
“…….”
침묵이 이어진다. 인간을 거역할 수 없는 안드로이드에게 다가오지 않은 채 박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카즈호. 날 두고 가면 어떡해.”
“…….”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
“…….”
“나한테 왜 이리 많은 걸 알려줬어? 그래놓고 떠나버리면, 나는….”
“…….”
“나는 널 항상 그리워하는 수밖에 없는 거야?”
너한테 더 미움받는 건 싫어…. 떨리는 목소리가 힘없이 사그라든다. 표정을 감춘 박사에게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박사가 울고 있었다. 깨달은 사실로 말미암아 걸음을 옮긴다.
“……그냥 둬. 건드리지 마….”
“…박사.”
“놔두라고…….”
움직이려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울고 있는 인간에게 어떤 행동이 유효한지는 알고 있다. 등을 쓸어내리거나, 체온을 나누거나, 가까운 곳에서 호흡을 맞추는 행위. 대상을 진정시키기 위해 행하는 것들. 박사는 위로를 거부하고 있었다.
카사하라 유키가 프로그래밍한 인간성은 그 정도에서 그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 애라면 멋대로 했을 일을 하지 못하도록. 그 애라면 무시했을 말을 순순히 따르도록. 진짜로 존재했던 그 애랑 혼동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길을 잃은 사랑을 전부 정 주지 않을 존재에게 덜어내고 싶었고, 이 기계가 어리석은 마음 따위는 전부 가져가 주었으면 했다. 모든 근원에 이기심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카사하라 유키는 결국 비틀비틀 걸음을 옮긴다. 엉망으로 호흡하며 떨리는 손이 카즈호의 옷자락을 움켜쥔다. 이마가 어깨에 닿는다. 기계를 끌어안는다.
“네가 정말 싫어.”
“…….”
“그런데도 계속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기계는 여전히 침묵했다. 유일한 세상이 품에 무너지는 동안. 박사가 떠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으므로.
10.
그날 이후로도 카즈호는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연구실에도, 즐겨 가던 유리 복도에도, 가끔은 그 애가 자주 앉던 소파에도 의미 없이 앉아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날의 일은 두 사람의 입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그날, 울다 지친 박사를 안드로이드가 침대에 데려다 두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박사가 잠들 때까지 옆에 함께 있었다. 박사가 잠기운이 묻은 눈을 떴을 때 안드로이드는 없었다. 마른 몸을 염려하듯 먹기 쉬운 음식만을 탁자에 올려둔 채였다.
그렇기에 자연히 카사하라 유키는 아카자키 카즈호를 떠올린다. 그 애와 나누었던 순간을 추억했다. 아팠던 아카자키 카즈호에게 죽을 먹여주는 거, 곤혹스러운 만큼 꽤 즐거웠는데…. 현재의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었을 그 애를 떠올리자 웃음이 터진다. 웃음 끝 몸을 일으켜 정갈하게 놓인 수저를 쥔다. 몇 입 떠먹기 무섭게 문이 열린다. 들어올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다.
“박사.”
“카즈호. 왔어?”
“응. ……울지 마.”
박사의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 보여서, 안드로이드는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모든 게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조차 아카자키 카즈호를 닮아 카사하라 유키는 다시 웃음을 흘린다.
“나는 박사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달래주면 돼.”
“하지 말라고 했었잖아.”
“…그땐 무시해.”
“그런 건 못하는데.”
떠먹여 준다거나, 간호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로봇은 그저 박사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햇빛이 잘 드는 소파 대신 박사의 곁에 앉아서.
“박사.”
“왜 자꾸 말을 걸어.”
“대답을 아직 안 해줬어.”
“어떤 거?”
“나는 ‘카즈호’와 닮아 있어?”
끝내 듣지 못한 대답을 요구한다. 박사가 선호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왜인지 모르게 지금의 박사라면 모든 걸 대답해 줄 것만 같았다. 바지런히 수저를 움직이던 박사의 행동이 서서히 멎는다. 양이 줄어든 그릇을 의미 없이 뒤적이던 박사는 결국 고갤 내저었다.
“……모르겠어.”
“박사가 만들었는데도?”
“응.”
“이상하네.”
“그러게….”
안드로이드는 더 묻지 않았다. 어떠한 결론을 얻어낸 것인지, 미결로 구분 지어 스스로 가설을 도출하는 것인지 박사로서는 알 수 없었다. 카즈호는 그저 입을 다문 채 유키를 응시했다. 할 말이 없어졌을 텐데도 굳이 떠나지 않은 채로. 그런 광경은 익숙하기에, 카사하라 유키도 다시 수저를 들었다. 조금 식어버린 죽을 떠서 입에 넣는다. 카즈호가 만들었을 텐데도 맛은 꽤 괜찮았다.
아카자키 카즈호는 여전히 없었고, 카사하라 유키는 여전히 박사였다. KZ-00001이 점검을 요구하는 일은 드물어졌다. 확인해 달라며 박사를 찾는 일 또한 마찬가지로. 카즈호는 그저 아카자키 카즈호처럼 일정한 주기로 유리 복도의 햇빛을 받았으며, 지정석처럼 자주 앉는 소파에서 홀로 사유하길 즐겼다. 카사하라 유키는 그럴 때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아카자키 카즈호도 꼭 같은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곤 했으니까. 그러나 끝내 묻지 않는 일들이 많아졌다.
카사하라 유키는 카즈호를 볼 때마다 아카자키 카즈호를 떠올렸다. 사람 하나가 차지하던 자리는 생각보다 커서, 사라진 뒤에야 오히려 그 모양을 선명하게 드러내기에. 카사하라 유키는 여전히 아카자키 카즈호와의 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장례식에서 본 얼굴에 제대로 인사를 건넬 수 있는 날은 아직 요원했다. 기일마다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넘기기도, 그 애의 가족들과 만나 가벼운 안부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마냥 불행하거나 즐겁지만도 않은 날들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살 수 있었다. 곁에 있었으니까.
그 애를 계속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기계가.
지나치게 닮아 있기에, 의도적으로 만든 다름조차 그 애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그런 생명이.
* 윤은하, 「파랑(波浪)은 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