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야, 기사 봤냐? 백하윤 한국 뜬다는 거. 다른 나라로 귀화한다던데?"
백하윤이 귀화라니. 종종 보이던 악의적인 기사라고 생각했지만 내용의 질이 여느 때와는 달랐다. 묘하게 구체적이고 이상할 만큼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걷은 프린트를 제출하러 교무실에 들렀던 단주호의 귀에 백하윤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당사자는 당연히 학교에 얼굴을 비춰주지도 않았다.
단주호는 백하윤이 훈련 때문에 연락도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숙소에 있을 때면 늦은 밤에나 겨우 백하윤이 먼저 전화를 걸어주곤 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여서 차마 못 참고 걸어버린 전화였었다. 그 몇 번 안 됐던 전화 몇 통 때문에 단주호는 전화를 늘 머리맡에 두고 잤다. 전화를 못 받으면 그날로부터 일주일은 연락이 안 되던 애였으니까.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전화를 걸어 기계적인 연결음이 세 번쯤 울렸을 때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보세요."
백하윤은 전화를 받았다.
01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백하윤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현재에서는 절대 만족할 수 없고 앞으로의 자신에게조차 기대를 쉽게 가지지 못해서 느껴지는 아픔이 그 나이에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만큼 자기를 간절하게 만드는 건 없었다고. 희게 타버리는 건 생각도 못 한 사람처럼.
백하윤은 그래서 늘 단주호의 곁에 돌아갔다. 몸도 마음도 형체 없이 녹아버리기 직전에는 가장 친한 친구가 기다려줬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 양궁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 자신 욕심껏 연습하기 위해 학교에도 몇 번 얼굴을 비추지 못했어도. 단주호는 묵묵히 백하윤의 비상과 기복을 몇 번이나 자신의 일상으로 덮어주었다.
백하윤은 단주호의 일상을 좋아했다. 보상처럼 느껴지던 승리감보다도. 가끔은 단주호와 함께 학교에 다녔다면 그거 나름대로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따뜻한 다정이었다. 백하윤은 그 따뜻한 상냥함이. 그곳에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때때로 두렵게 느껴졌었다. 자신이 가진 그 욕심 많은 운명을 거스르고 싶다는 마음이 들까 두려웠다. 자신이 가진 모든 기회보다도 그 하루가 간절한 날이 있었으니까.
02
단주호의 전화를 받은 백하윤은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한 마디를 끝마칠 때마다 기침이 멎지 않았다. 백하윤은 숨겨보려 한 것 같아도 숨을 참았다 크게 몰아쉬는 소리가 단주호의 귀에 다 들렸다. 보통 때 같다면 단주호가 묻지 않아도 먼저 전부 말해주는 백하윤이었겠지만 통화 너머로 입을 꾹 닫은 백하윤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백하윤은 울고 있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길어질 즈음 백하윤이 먼저 목소리를 냈다. 느리고 힘 빠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 이상한 목소리 속에 들린 건 지독한 감기에 걸려 병원에 잠깐 들리기 위해 본가로 왔다는 말이었다. 단주호는 그 말에 백하윤이 무엇을 강제로 포기당했고 그래서 왜 그런 소문이 돌았는가 이해하는 데까지 어렵지 않았다.
"지금 갈게."
단주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백하윤의 전화를 끊었다.
03
"나는 분명 오지 말라고 하려고 했어. 왜 그렇게 참을성도 없이 전화를 막 끊어?"
"그래도 왔으니까 문 열어줘."
"싫어. 너 미워. 너 말고도 전부 다."
"나 너희 집 비밀번호 알고 있는 거 알지."
"할머니도 미워!"
오래 못 가 신경질 부리듯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멋대로 조퇴하고 찾아와서 아직 늦은 시간도 아니었지만 백하윤의 집 안은 캄캄했다. 집에는 오늘 돌아왔는지 현관문 앞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짐 가방이 단주호의 눈에 보였다. 현관등에 비친 백하윤은 낯빛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게 감기 탓인지 자기 분에 못 이겨 그렇게 된 건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발그레한 얼굴에 비해 표정은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단주호는 백하윤이 집에서 혼자 침울해져서 울고 있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단주호가 찾아온 게 마음에 전혀 안 드는 태도였지만 백하윤은 나가라는 말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집 안으로 들어오는 단주호를 지켜보다가 본인 방으로 들어갔다. 단주호는 백하윤의 짐 가방을 들고 묵묵히 그 뒤를 쫓았다. 따라올 걸 예상했다는 듯 백하윤이 들어간 방문은 열려있었다.
백하윤의 방은 시끄러운 방 주인과는 거리가 있는 분위기의 방이었다. 오로지 잠만 자고 나가는 방처럼 혼자서 쓰기엔 넓은 침대 하나와 선반 장식장, 그리고 정원이 보이는 통창 하나. 그게 전부였다. 백하윤은 집안의 불은 아무것도 안 켜둘 생각이었는지 방까지 깜깜했다. 단주호는 창문을 가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으로만 방의 내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침대 위에서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이불로 덮고 있는 백하윤까지. 단주호는 침대 옆에 서서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안 더워?"
"더워. 너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야?"
"조퇴했어."
"안 본 사이에 양아치 다됐네 단주호."
"학교 빠진 횟수로 세면 너만 할까."
"너랑 나랑 같아?"
"달라?"
"다르지!"
"난 다르다고 생각 안 해. 나도 아프면 학교 안 나가."
"...하하. 그 말 하러 학교도 째고 여기까지 왔어?"
이불을 확 걷어낸 백하윤이 옆에 서 있는 단주호를 노려봤다. 다른 날 같았다면 웃으며 들어줬을 단주호의 서툰 위로였어도 백하윤에게 오늘은 차마 그게 되는 날이 아니었다.
"선발전. 아직 시간 남았잖아."
"나 되게 심각하구나. 네가 이런 얘기까지 할 정도면. 밖에서 얼마나 씹어대고 있는 건지 예상도 안 되네."
자조적인 말을 길게 이은 백하윤이 참았던 기침을 몰아 콜록거렸다. 등이 찢어질 것처럼 오래 기침하던 백하윤은 이내 숨이 벅차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늘 항상 바른 자세로만 앉던 백하윤이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고통스러운 듯 앞머리를 양손으로 쥐어 잡았다. 단주호의 눈에는 그 백하윤이 활이 아닌 자기 자신을 붙들고 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너 어디까지 들었어?"
04
백하윤의 현재에는 붙잡아 박제해 둔 여러 꿈이 있었다. 가장 반짝일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끝끝내 쥐고 말 것이라 스스로에게 장담했던 목표를 놓치게 되었을 땐 분별력 같은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게 백하윤의 현재 상황이었다. 선발전이 3주 남짓 남은 시점. 경기 연습 도중 백하윤은 고열에 시달려 회복하는 데에 약 사흘간의 시간을 허비하다가 결국 선수촌 측에서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받았다.
그리고 그 소식이 대체 어디서 새어나갔는지 알 수는 없어도 그 사흘 사이동안 백하윤의 숙소로 찾아온 협회 소속 스카우터들이 여럿 있었다. 금메달 유력 후보였던 선수가 아프더라도 쉽게 보내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백하윤의 간절함을 이용하려 들었다. 한국의 선발전은 경쟁이 쟁쟁하지만 다른 나라라면 언제든 국제경기 선발 선수로 출전이 가능할 거라는 얘기였다. 백하윤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이 선수촌에서 퍼져 외부에도 닿더니 기어코 기사가 터져버렸다.
하필 백하윤의 조부모님은 현재 해외로 부재중이었고, 백하윤은 한국에 혼자 남아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조국의 배반에 대한 비난을 홀로 받고 있었다. 하지만 단주호의 눈에는 백하윤이 그런 말들에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백하윤은 예기치 않은 불행으로 오래 바라왔던 꿈을 놓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바뀌지 않을 그 사실이 백하윤을 기침하게 했고 멎는 법을 잊게 했다.
05
백하윤의 물음에도 적막이 길게 이어졌다. 그건 단주호의 대답이었다. 침묵을 읽은 백하윤은 콜록대던 기침을 쏟아내고 두 손으로 쥐고 있었던 머리칼을 놓았다. 백하윤의 고개가 들렸다. 단주호는 그 모습을 전부 지켜봤다.
"주호야."
높이가 다른 두 시선이 교차했다.
"내가 대한민국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가면 어떨 거 같아."
누군가의 숨이 삼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나랑 어디까지 같이 갈 수 있어?"
06
"백하윤."
"빨리 결정해야 한대. 출전 선수 엔트리에 나 끼워줄 생각이라더라."
"...하윤아."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표도 받았어. 전화만 하면 돼."
"가기 싫잖아 너."
"내 마음이 무슨 상관이야."
"...그래. 네 마음이 그렇다면 나도 상관없어."
"비꼬지 마. 지금 그런 말 들어줄 기분 아니니까."
"어디든 같이 가줄게."
단주호는 침대 모서리에 무릎 한쪽을 대고 올라가 백하윤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백하윤은 단주호가 가끔 말하는 한계 없이 무책임한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몸은 자꾸만 초조하게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게 얼마나 꼴사나운지 알지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것도. 지금도 봐. 손이 제멋대로 네 어깨나 붙잡고 있잖아.
백하윤이 밀어낼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단주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내려다봤던 백하윤의 젖은 뺨에 찬 손을 대곤 열기를 식혔다. 기침까지 참아가며 뱉었던 가시 돋친 뾰족한 말이 단주호의 손길에 뭉그러지는 걸 백하윤은 느꼈다. 미운 마음이 녹아 없어진 자리에 외면하고 있었던 두려움이 몰려왔다.
"너랑 있을게."
한없이 다정하기만 한 것 같은 말에 백하윤은 단주호가 소리내어 말하지 못한 속내를 읽었다.
네가 그걸 원하는 게 맞다면.
07
단주호는 백하윤이 택할 수 있는 모든 최초 중에 가장 어려운 존재다.
함께 하던 친구 놀이가 이상하게 느껴진 순간부터 이 전제는 변하지 않는다. 명확한 하루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해진 순서처럼 백하윤의 인생에 단주호가 겹쳤을 뿐. 옆집 사는 동갑내기 남자애에서 같은 학교 친구, 그리고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
백하윤이 어렵게 갈취하던 행복을 단주호는 쉽게 느낄 수 있게 했다. 그 사실에 대해 백하윤은 마냥 기뻐할 수 없다. 백하윤이 그간 일궈온 모든 노력의 종착지가 단주호가 될 수는 있어도, 중간지점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재의 백하윤에게 사랑은 아무 소용 없다는 이성적인 이유로. 사랑같이 아기자기한 감정은 현실적으로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고 제 의지에 섞여버리게 된다면 그건 최악이라고만 얘기할 것이라. 당장만 봐도 바보 같은 마음 하나 탓에 쉽게 결정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제시받은 조건은 누가 봐도 나쁘지 않았다. 그중에 굳이 문제점을 꼽자면 조국에 대한 배신 같은 숭고한 고민거리나 멀어지는 거리 따위보다도 자신의 뒤를 쫓을 꼬리표의 내용일 뿐일 정도로. 어쩔 수 없이 상처받겠지. 하지만 백하윤은 그때가 되면 한국에 있지 않을 것이고,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모든 것에 외면하고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단주호는 남겨진다. 백하윤의 선택으로 백하윤에 대해 쉽게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래서 우리가 아직 어린 애들이라는 거야. 뭐 하나 쉽게 마음먹을 수 있는 게 없잖아. 이런 내가 너를 어떻게 겁 없이 좋아해.
백하윤은 단주호에게 느끼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건 금으로 만든 메달 같은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떠들고 다니는 빛나는 명성이나 그린 듯이 완벽해 보이는 목표 같은 것도 해당되지 않았다. 단주호에겐 특권이 있다. 단주호는 백하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어렵게 얻은 승리나 쉽게 얻은 승리나. 둘이 갖는 결과는 같을 수밖에 없다는 걸 백하윤은 잘 알고 있다. 그중에 무엇이 더 값진 것인지 따지는 건 언제나 이길 수 있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08
백하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주호가 배려 없이 뱉은 단 두 마디에 매달려버리고 싶다고 생각해서. 지금에야말로 지긋지긋한 경쟁에서 벗어나 네 곁에 머무르길 택할 수 있을까 싶어서.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평생 나를 이겨 먹을 생각만 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이 악물고 덤볐을 텐데. 널 미워하는 마음이라는 걸 잠시 가져봤을지도 모를 텐데. 근데 웃기지 않냐?
네가 뭔데 나보다 내 마음을 생각해.
시끄러운 속을 홀로 재우는 중인 백하윤을 지켜보던 단주호는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열이 영 신경 쓰여 잠시 물러나려 했다. 손을 거둬내고 물수건이라도 만들어오겠다고 얘기하려는 찰나, 백하윤이 단주호의 교복 넥타이를 당겨왔다. 그건 떠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열기에 익은 고개를 옆으로 비튼 백하윤이 단주호의 시선에 걸쳐졌다. 반쯤 감은 눈꺼풀 사이로 푸른 동공이 감춰졌다. 훅 끼쳐오는 따뜻한 백하윤의 체향이 가까워지고 이윽고 입이 맞춰진다. 두 사람 몫의 숨이 섞여 백하윤의 마른 혀가 타액으로 젖어 들 즈음 뒤늦게 먼저 정신 차린 단주호가 백하윤을 붙잡아 떨어트렸다. 갑작스러운 키스를 탓하지도 않고 입만 감싸 쥔 단주호를 보며 백하윤은 오랜만에 승리감을 느꼈다. 잘하지도 못하는 키스를 우악스럽게 맞대온 탓에 피가 터져버린 입술이 옆으로 길게 늘어지며 호선을 그렸다. 도망치더라도 너랑은 안 가.
"그러니까 가져가. 감기든 뭐든."
그렇게 나를 네 곁에 붙잡아 둬. 그렇게 말하는듯한 눈을 마주한 단주호는 백하윤과 같은 자리에 찢어진 입술을 매만지며 고개를 떨궜다. 이런 건 치사해 백하윤. 내가 전화도 안 했으면 네 마음대로 결정했을 거면서. 하지만 단주호의 그 가정은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백하윤의 선택과 충동심의 출발에서 가장 고려되어야 할 부분은 자신의 마음보다도 더 중요한 다른 마음이니까. 이에 대해 알게 되는 건 훗날의 얘기일지 몰라도. 교복 자켓을 벗으며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온 단주호를 지켜보던 백하윤은 등을 굽혀 잔기침을 콜록였다. 잡아 쥔 넥타이를 놓치자 비워진 손에 단주호의 손이 겹쳐졌다.
"전화하지 마 백하윤."
단주호는 백하윤에게 도망을 함부로 허락하지 않는다. 백하윤이 가진 결핍성 짙은 운명에 반하는 행동만 저지른다. 너는 나를 약하게 만들어. 다 포기하고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게 한다고. 그런 주제에 나에게 뭐든 가지라고 말해. 단주호는 백하윤에게 있어 상실의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이다. 백하윤이 가진 욕심과 오기를 빚어 만들어낸 유일한 중심점. 그렇기 때문에 단주호는 도망가지 않는다. 백하윤에게 도망칠 곳이 되어주기 위해. 그 애가 돌아올 곳이 되어주기 위해.
"나랑 있어."
백하윤은 기울어진 햇빛 사이에 걸쳐진 단주호의 귀가 새빨갛게 익은 것을 본다. 물기만 가득하던 백하윤의 낯에 허물어진 미소가 띤다. 근데 내가 감기 가져가려면 얼마나 해야 돼. 키스하는데 그런 거 묻지 마 멍청아.
09
며칠 뒤, 백하윤의 귀화 소문은 싱겁게 식어버렸다. 그야 무식한 방법이긴 했어도 백하윤의 감기를 단주호가 가져가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현대 의학보다 뜬구름 같은 소문에 기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남긴 채 백하윤은 선수촌으로 복귀했다. 선발전이 약 이주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렇게 홀로 독한 감기를 앓게 된 단주호는 병치레를 이유로 일주일은 등교할 수 없었다. 온몸이 쑤시고 고열에 시달렸지만 단주호는 아픔을 위안 삼을 수 있었다. 만약 이 감기가 백하윤에게 남아있었다면 그만큼 끔찍한 일은 없었을 거다. 감기와 함께 찾아온 성장통 때문에 살면서 가장 힘든 일주일을 보내긴 했어도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그땐 백하윤보다 먼저 선수치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며 단주호는 시간을 보냈다.
선발전 결과에 대한 건 기사보다도 당사자의 연락을 통해 먼저 전해 들었다. 휴대폰 액정 너머 웃고있을 표정이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백하윤은 밝은 목소리였다. 나 이제 국가대표야 주호야.
10
그 전화를 끝으로 백하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사실 소식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단주호가 백하윤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을 뿐이지,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백하윤은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이라. 그 애의 수군거림이 단주호의 귀에 끊임없이 들려왔다. 학교에선 일면식 없는 애들까지 단주호에게 아는 체하며 백하윤에 관해 물어왔다. 안 그래도 없는 사교성에 친하지도 않은 애들에게 쉬는 시간마다 휘둘리고 있자니, 단주호는 조용히 있을 수 있는 학교 뒤편으로 빠져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차라리 아파서 못 나왔던 때가 그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노력에도 결국 결승 당일에는 교장의 결정으로 백하윤을 응원해 주겠답시고 수업 시간 통째로 체육관에 모든 선생님과 학생이 모여 생방송을 지켜보게 됐다. 그 사이에는 당연히 단주호도 포함되어있었다. 어쨌든 볼 생각이었으니까. 이렇게 시끄러운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볼 계획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전부 백하윤을 응원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건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거대한 스크린 위에 띄워진 백하윤은 그곳에 있는 사람 중 가장 흰 유니폼이 잘 어울려 보였다. 백하윤은 금방이라도 미소를 지을 것처럼 혈색 붉은 뺨이 상기되어있었다. 그 모습에 단주호는 속으로 변하지 않을 자신의 우상을 되새긴다. 백하윤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고.